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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노란 씨앗 꿈을 꿨어. 나는 오늘도 자신 있게 꿈 일기를 써. 꿈에서 깨자마자 활자로 생각하고 손가락으로 옮겨. 필사하듯, 머리에 주어진 문장을 그대로 적어. 꾸준하게 꿈 일기를 쓰면 기억력이 좋아진대. 나는 기억력이 아주 좋아지 고 싶어. 악보를 모두 외워서 치는 피아니스트나 사물을 안 보고 그리는 화가처럼 말이야. 사실 노란 씨앗 꿈은 하도 많이 꿔서 지나치게 선명해. 나는 그 씨앗을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잘 알아. 중요한 사실은 씨앗도 나를 알고 있다는 거야. 씨앗 꿈이 반복되는 건 씨앗이 나를 기억하기 때문이야. 너라면 내 말을 이해할 거야. 꿈은 절대 영성하거나 애 매한 것이 아니야. 꿈은 추상의 세계가 아니야. 오히려 현실에서 비껴난 감각이 살아나는 곳이야. 꿈은 아주 구체적으 로 풍성해. 꿈 이야기는 궤변이 아니야. 나는 어쩌면 꿈 얘기를 하고 싶어서 씨앗 꿈을 계속 꾸는지도 몰라. 씨앗은 늘 침묵으로 시작해. 우주에 박힌 점처럼 신비로워. 나는 지금 서쪽에서 동쪽으로 글을 쓰고 있지만 꿈에는 사방이 없어. 시공간은 씨앗만이 가질 수 있어. 씨앗은 신처럼 시공간을 끌어당겨. 씨앗은 순식간에 보름달만 한 몸으로 부푸는 법을 알아. 노란 씨앗만의 엔트로피적 시간, 씨앗의 생명력은 껍질을 찢고 나올 때 하얀 나팔꽃으로 피어나. 오래된 의식을 치르듯 아주 우아한 동작으로. 꿈을 구간 반복할 수 있다면 나는 이 장면을 고를 거야. 방금 나는 머릿속으로 꽃을 여 러 번 다시 피워냈어. 반복은 어떻게 사랑이 되는 걸까? 씨앗을 반복하다 보면 씨앗을 사랑하게 돼. 꿈에 뿌리내린 사 랑은 어디까지 뻗어나갈 수 있을까.
언젠가는 소금 기둥이 된 꿈을 꿨어. 주위가 온통 불바다였어. 내 모습을 볼 수는 없었지만 온몸을 빼곡히 채운 알갱이 들이 생경했어. 뜨거운 열기에도 한 톨 한 톨 단단했어. 작은 입자들이 각자 섬세한 방식으로 불빛을 밀어냈고, 불길이 거세질수록 격렬하게 반짝였어. 나는 소금인 채로 세상에 빛을 더하고 더했어. 은하수가 된 듯 황홀했지. 그러다 문득 꿈에서 깼을 때 느낀 건, 순식간에 전신을 탕진한 상실감. 꿈은 어쩌면 도달한 적 없는 그리움의 고향 아닐까? 예외적 인 존재와 감각이 불현듯 나타나는 곳. 정처 없는 노스텔지어를 배태한 곳. 생멸을 구분하지 않는 곳. 모든 기준이 허 물어지는 곳. 운명과 우연이 교차하는 곳.... 상상은 현실에 꿈의 세계가 쳐들어오는 거래. 다른 차원의 감각이 동시적 인 두께로 겹치는 사건, 나는 이걸 떠돌이 감각이라고 불러. 이를테면 양발을 땅에 두고 하늘 멀리 방랑하는 탈-중력의 감각, 별을 볼 때처럼 사라진 존재의 흔적을 마주할 때 느끼는 잿빛 시간성, 일상에 겹치는 너와 관련한 모든 심상들.
실은 어느 날부터, 지나치게 중복되는 씨앗 꿈이 내 착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 전에 꿨던 꿈이 너무 강렬해서 마음에 각인되어 버린 게 아닐까? 아침마다 내 머리가 고장 난 영사기처럼 그 부분만 돌리고 있는 건 아닐 까? 어쩌면 사랑이 강박적인 반복을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스스로에 대한 의심은 무수한 경험을 폐허로 만들어. 왜 인간의 기억은 소금보다 취약할까, 한탄하던 차에 A를 만났어. A는 꿈을 포착하는 기계 발명가였어. 놀랍게도 떠돌이 감각에 대해 알고 있었지. 물론 좀 더 전문적인 용어로 설명했지만 나는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어. 나는 A 에게 꿈과 떠돌이 감각, 너에 대해 들려줬어. A가 말하길, 꿈은 떠돌이 감각이 응축된 세계래. 꿈 포착 기계는 꿈에 흐르는 떠돌이 감각에서 심상을 붙잡아 시각화한다고 했어. 꿈을 꾸는 동안 1.일정량의 떠돌이 감각이 증폭기에 아 롱아롱 맺히면 2.증폭기는 입력된 심상의 에너지를 키워서 방출하고 3.고출력된 심상 에너지가 감광판 같은 육각형 기계장치에 닿는 순간 4.꿈속 이미지가 출현하며 갇히는 원리였어. A는 내가 원한다면 꿈을 확인시켜 준다고 했어. 흥분되면서도 복잡한 심경이었지. 현실의 오감만으로 꿈의 장면을 이해할 수 있을까? A는 걱정말라고 했어. 씨앗은 내가 너를 기억하는 느낌으로 나타날 거라고.
A는 신기루에 깃발을 꽂고 실험실을 차렸다고 했어. 나는 오늘 밤 A를 찾아갈 거야.
2024년 12월 너의⊹
글, 기획: 지하운
방선우, 최재원 2인전 《도달할 기억의 예감 Echoes of Memory》
일시: 2024.12.13.(금) - 12.31.(화)
운영시간: 13:00 - 19:00 (월요일 휴관)
장소: 스페이스 미라주(서울 중구 을지로 130-1 401호)
운영시간: 13:00 - 19:00 (월요일 휴관)
장소: 스페이스 미라주(서울 중구 을지로 130-1 401호)
* 전시 국문명은 이혜미 시인 「도착하는 빛」의 한 구절, “도달할 행성의 예감”에서 착안했습니다.